정체성/비전

정체성/비전

정체성

1962년 5월 13일 경향신문에는 한국연구원 관련 기사 하나가 실렸습니다. “연구자 10명에게 연구비 4백 80만환, 한국연구원서 지급” 이 금액은 현재 가치로 1억 9천만원 정도의 가치를 가집니다.

 

당시에는 한국학 연구자들을 후원하는 제도가 거의 없었고 애써 거둔 연구 성과를 공개할 공론장도 여의치 않았기에, 연구원의 지원 사실만으로도 뉴스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연구원의 지원을 받은 연구는 역시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한국연구원은 연구지원제도가 척박했던 이 땅에서 처음으로 연구자들을 응원하고 후원했던 기관 중 하나이자, 학문과 대중을 소통하는 플랫폼이었습니다.

 

한국연구원은 지금까지 한국인의 삶을 충실히 기록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을 지원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1963년 김은우 박사가 쓴 <한국여성의 애정갈등의 원인연구>는 당시의 한국여성의 애정갈등을 보다 심층적인 방식으로 파고든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50년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전쟁미망인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그 자신의 삶을 사는 여성이라기보다는 그저 어머니 혹은 과부 정도로만 취급받았습니다. 주변에 재혼을 시도하는 미망인이 있다면 ‘아프레걸’ ‘자유부인’ 등으로 방탕한 이미지를 부여해 고립시켰습니다. 이렇게 50-60년대 한국여성들은 애정의 문제에 있어 사회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습니다.

 

한국연구원은 당대 한국인의 삶을 기록하고 연구하자는 취지로 이 연구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인의 정서와 삶, 정신적 기원, 역사, 제도를 다룬 다방면, 다종의 연구들이 한국연구원 총서로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한국연구원이 한국학 연구를 후원하는 단체라면, 과연 한국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는 한국학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첫째, 한국학이란 한국어로 표현된 학적 체계 전반을 가리킵니다. 정치공동체(국가)나 민족(인종)을 비롯한 그 어떤 것보다 선행해 한국학을 결정짓는 존재는 바로 언어입니다. 이 점에서 한국학은 한국어에 기반합니다. 체코 프라하의 시민이자 유대인 작가였던 카프카를 독일학에서 결코 배제할 수 없듯이, 중국 연변 용정에서 출생한 윤동주나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출생한 김소월을 한국학에서 배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둘째, 한국학이란 한국어와 역사적으로 관련된 공동체의 문화 전반에 대한 지식 체계를 뜻합니다. 역사란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해 주는 집단 기억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사적 공동체와 관련된 정치, 사회, 문화의 제반 현상은 모두 한국학의 대상입니다.

 

셋째, 한국학은 한국어 사용자들의 삶에서 우러나온 감성과 생각 체계의 고유성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고유성을 강조하되, 한국에 수용된 외래문화가 변용되는 과정과 지점에 한국학은 주목해야 합니다. 문화접변이 발생할 때 한국인의 감성과 사유 체계가 어떤 굴절을 겪는지를 포착하는 것이 한국학이 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한국학은 한국어로 표현된 인문 사회적 성찰을 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보편성을 지향하지만 동시에 특수성이나 지역성을 포기하지 않는 글로컬(Glocal) 이념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이념의 기저에는 다음과 같은 철학적 전제, 즉 유한한 인간에게 허락된 보편은 특수를 배제하거나 지양하는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특수라는 토양에 뿌리를 깊이 내릴수록 더 높은 보편으로 고양될 수 있다는 철학이 깔려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한국학이란 한국어로 역사를 이룬 공동체의 사유 체계와 문화 전반에 관한 인문 사회적 학문 체계를 의미합니다. 한국연구원은 이런 의미에서의 한국학 진흥을 지원하고, 연구자를 발굴하여 후원하는 재단입니다. 한국연구원은 한국학을 보다 튼튼하게 뿌리 내리고 그 지평을 확대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충실한 후원자가 되고자 합니다.

비전

본원은 새로운 사옥 구입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사회학 연구원이란 전통을 이어 받아 새롭게 시작합니다. 본 연구원은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과 타묵를 하는 인문사회학자를 지원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공공선에 기여하는 인문사회학 연구원으로 새롭게 출발할 것입니다.